Previosuly on Gil's retro:
"회사를 옮긴 지 2년이 되었고, 대기업과 무엇이 다른지, 그래서 뭐가 좋은지 정리할 필요를 느꼈다."
2021/01/13 - [Retro] - 이직 2년차 회고 -1 : 대기업 Product manager 생활
나는 참 걱정이 많은 사람이다.
생애 처음으로 인턴을 했을 때, 당시의 내 팀장님은 나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너는 목표가 뭐니?"
나는 사실 한치도 주저하지 않고, 이렇게 대답했다.
"살아남는거요."
저 말의 배경에는 사실, 월급 체납이 있었다.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주에 절반은 회사를 다니거나, 프리랜서로 일했던 경험이 있던 나는 적지 않은 횟수로 월급이 안 나오거나, 페이가 줄어드는 경험을 했었다. 저 질문을 들은 지가, 만 11년이 넘어간다. 그리고 외국계로 이직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나를 8년이나 품어준 따듯하고 안락한 친정(첫 회사)의 품을 떠나기로 마음먹었을 때, 나의 목표는 한번 더, '살아남는 것'이었다.
월급 받는 이유를 스스로 증명하기
직장생활을 처음 시작하던 시기에도 내 머릿속에 가장 굵직한 키워드는 '살아남기'였던 만큼, 나는 회사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정보를 여기저기서 얻었던 기억이 난다. 그중 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책은 아래의 [입사 후 3년]이라는 책이다.
입사 후 3년
신현만 저
저자가 헤드헌터 회사 대표로서 수많은 경력 직장인들과 기업의 인사채용 담당자들과의 컨설팅, 인터뷰를 통해서 얻은 성공적인 직장생활을 위한 일종의 데이터베이스. 이 책은 직장생활에서 몸살을 앓고 있는 직장인들의 고민에 따른 대안과 사례들을 풍부하게 열거하고 ‘인재 전쟁’이라는 전투 속에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
www.yes24.com/Product/Goods/1479866
다른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는데, 아래의 내용은 확실하게 기억이 난다. 대략, 나의 목소리로 옮기자면 이렇다.
당신의 연봉의 3배를 회사에 벌어다 주어야 한다. 회사는 당신에게 제공하는 월급 외에도, 사무실을 유지하는 비용이나 당신에게 제공되는 장비, 집기 등에도 비용을 쓰고 있다. 당신에게 제공되는 월급이 1이라면, 이러한 비용이 1이고, 나머지 1은 회사 몫의 이익이다. 그래서 3배를 벌어야 하는 것이다.
결국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대기업 생활에서 나는 냉정하게 말하면 회사에 얼마를 가져다주는지 정확히 몰랐다. 회사가 나에게 월급을 주어야 하는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었다. 내가 소속되어 있었던 회사만의 특징일 수도 있고, 대기업 중에서도 칼같이 한 사람 한 사람의 성과를 측정하는 곳도 분명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삼성? 안 다녀봐서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건, 내가 다니던 회사의 평가 시스템은 결국 큰 맥락에서 저걸 원치 않았다는 거다. 애초에 사람을 잘 내보내지 못하기 때문에 (해고도 어렵고, 퇴사도 적고), 수많은 프리라이더가 있었고, 자연스럽게도 회사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투명하게 Break-down 된 목표 할당과 평가를 원치 않았다.
사실 그렇게 세분화하여 성과를 평가하려면, 결국 그에 합당하게 보상에도 차등이 주어져야 한다. 하지만 그 회사의 평가 시스템은 그러한 제도를 포용하기엔 어려워 보였다. 어찌 되었던 '공채'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회사이고, 연차가 평가를 담보해주는 방식이, 모두에게 평화로운 방식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어쩌다 보니, 배경 설명 2부를 진행해 버렸다. 이제 진짜, 옮긴 회사 이야기를 해보자.
그래서, 그 회사에서 Product manager는 무얼 하나요?
IT Industry 짬밥 8년, 사실 회사를 다니며 게임사 출신을 본 적이 없지 않다. 특히, 내가 만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게임사에서 '비게임' Product를 맡았던 기획자 혹은 개발자였다. 그래서 이 회사에 대한 Offer가 왔을 때, 면접에서 가장 궁금했던 부분도 이 질문이었다. 대체, 이 회사가 왜 뜬금없이, 그것도 한국에서 PM을 뽑는가.
다행히, 당장 입사하면 맡을 Product가 있었다. 그래서 사실, 그 Product를 성공적으로 론칭하고, 1-2년 정도 운영하고, 그 뒤에는?이라는 불안감을 가지고 이직을 하긴 했다. 그래서 당시, 인터뷰를 보았던 대표님이 "회사 옮기는걸 무슨 부서 이동하듯이 생각하는 것 같다."라고 피드백했었는데, 그분이 정확히 보신 것 같다.
저 질문을 가장 먼저 던진 이유는 당연히, 저 질문이 "그래서 내가 회사에 뭘로 돈을 벌어다 주면 되나요?"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본 수많은 게임회사의 '비게임' 담당자들은 저 Challenge를 가장 많이 받았다. 당연히 나도, 이직을 마음먹은 순간부터 내가 가장 많이 받게 될 Challenge는 저것이 될 거라고, 각오를 하고 이직을 했다.
그리고, 매우 ㄴㅇㄱ!!! 스럽게도, 입사 후 3개월 만에 내가 맡기로 한 Product는 접혔다. 수습기간 6개월 중, 3개월이 지나던 시점이었다. 어쩐지, PM이 입사도 안 했는데, 내년 1월에 그 App이 서비스해야 하는 e스포츠 리그가 시작하는데, 입사 천천히 해도 된다고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데.
입사 3개월 차, 나는 백수가 될 위기에 놓였다. 운이 좋게도, 수습 6개월 기간 동안에는 "내가 생각하기에는 우선순위가 높지는 않지만" 회사가 생각하기에 우선순위가 높은 (사실은 당시 대표님이 정말 하고 싶었던 숙원 사업인) 웹사이트 개편이 있었다. 개인적으로 저 웹사이트 개편이, '잘할 수' 있지만 재미있고 (스스로 생각하기에) 의미 있는 업무는 아니었던지라, 사이드 프로젝트로 외부에 공급하는 데이터 사업의 구색을 갖추는 작업도 병행했다. 덕분에 좀 회사에서 수명(?)이 늘었고, 나는 저 '나 아니면 안 되면서도 회사에 아주 중요한 업무'를 찾는데 주력했다. 기회가 닿는 대로, 저 '데이터 사업의 구색을 갖추는 작업'의 Retro도 한번 적어보기로 하고, 다시 오늘의 주제로 돌아가면...
그래서, 그 회사에서 Product manager는 무얼 하냐구요?
다행히, 2년이나 회사를 다닐 수 있었던 이유는 저 답을 찾았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회사의 Product manager들 중에 대다수는 Producer라는 타이틀을 달고, 게임 관련 업무를 한다. 게임 개발, 게임 론칭, 업데이트 등등. 사실 비게임 PM이라 그 친구들 뭐 하는지 잘 모르겠다. (한국엔 없기도 하고.)
나는 비 게임 Product manager다. 그래서, 이 회사에 들어와서 가장 열심히 고민했던 영역 중 하나가 바로 이건대, 내가 이 회사에서 월급 받으면서 다니려면, 회사에 꼭 필요한, 즉 '없어서는 안 될' 업무를 맡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 중에서도 '나 아니면 안될' 업무라면 금상 첨화였고.
그리고 다행히, 입사 후 만 1년 정도가 채 되기 전에, 나는 '비게임' 영역 중에서도,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사업을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되는 서비스 2가지 서비스를 찾았다. 그리고 그중 하나의 Product Owner를 맡았고, 지금은 두 번째 서비스까지 PO를 맡았다.
아니 그래서, 대체 그 회사에서 Product manager로서 무얼 하냐구요!
네, 저는 저희 회사 게임들을 위한 한국용 회원 시스템을 담당합니다.
저 말을 할 수 있기까지, 사실 속으로는 엄청 불안 했다. 경력직 이직을 했으니, 정말 회사에 내가 월급 받는 이유를 가져다 주어야 하는데, 결국 수습이 끝날때까지 그 답을 못찾았으니 정말 백수 되는 줄 알았다. (회사에서 아무도 그거 가지고 뭐라고 안했다. 그냥 내가 불안한 거지.)
2가지 서비스 중 하나는 회원이다. 회원은 사실 전 직장에서 가장 하기 싫었던 업무이면서, 동시에 내가 생각해도 내 커리어에서 가장 잘하던 업무 중 하나였다. 그래도 벌써 회원 업무 짬밥 7년, 0부터 만드는 경험부터 정말 끔찍한 Legacy를 가진 시스템 개편까지 회원만 7년을 해본 경험을 바탕으로 정리해보면, 회원 업무의 특성은 이렇다.
- Front-end 기획도 중요하지만, Back-end 관련 이해도가 필수인 포지션.
- (처음부터 만드는 축복을 누리는 경우를 제외하고) Legacy 시스템에 대한 파악을 할 줄 알아야 한다.
- 인터넷 서비스 사업자가 지켜야 할 법률적 준수사항에 대해 잘 알면 유리하다. 즉, 회원을 오래 해봤을수록 회원 담당자로서 유리하다.
- 우리 서비스도 잘 알아야 하는데, 남의 서비스 (본인 확인 서비스, 휴대폰 점유 인증 등)도 잘 알아야 한다. 그래서 회원을 오래 해봤을수록 회원 담당자로서 유리하다.
한마디로, 고인물용 포지션이다. 대부분 회사에서 회원 담당은 아무한테나 잘 안 맡긴다. 심지어, 본사가 따로 있고 그래서 Global standard 하게 만들어 놓은 시스템이 있는데, 이를 한국에 맞춰서 현지화를 해야 하는 업무라니, 말만 들어도 의존성 (dependency) 천국이다. Dependency가 올라가면, 당연히 복잡성도 올라가고, 얘기 나눠야 할 Stakeholder들도 그만큼 많아진다. 한마디로, 업무 난이도가 비례해서 오른다.
사실 그래서, 회원은 다시 하기 싫은 업무 중 하나였지만, 이제는 내 커리어의 꿀 같은 경력 중 하나가 되어버렸다. 이 회사에 와서, 회원 업무를 맡는 순간, 회사에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거다.
"저는 한국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한국용 회원 시스템의 PO입니다."
네, 그리고 두 번째 서비스는 결제입니다. 결제도 회원 못지않게 업무의 성격이 비슷- 하다. 한 번도 맡아본 적이 없고, (사실 다른 회사에 있을 땐 별로 맡고 싶지 않아서 피해 다녔지만) 이제는 그냥 인정해야겠다. 나는 저런 업무를 잘한다.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은 다른데, 이제는 하다 보니 좋아지기까지 한다.
그리고, 이제는 '왜' 회원과 결제 업무가 다른 회사에서 재미가 없었는지도 조금 알 것 같다. 이 부분은 다음 글에서 2부로 다뤄봐야겠다. (결국, 대기업과 지금 회사가 다른 점이 그 원인이다.) 글이 너무 길어졌다.
사설이 생각보다 길어졌다. 옛날이야기가 재미있어지는 것을 보니, 아저씨가 다 되었다.
그래서 오늘의 회고, 이 글에서 하고자 했던 이야기는 사실 이거 한 줄이다.
이미 눈치채셨겠지만,
"내가 회사에 기여하는 바를 확실하게 알 수 있는지 없는지가, 내가 느낀 대기업과 (특히 경력직으로 이직해온) 작은 회사(?)의 가장 큰 차이다."
좀 더 짧게, 이 회사로 옮기고 나서야 명확하게, 나는 "내가 월급 받는 이유"를 회사와 나, 모두에게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최근에 동료 중 한 분이, 나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그래서, 길님은 요즘 행복한가요?"
별로 주저 없이, 고민 없이 답할 수 있었다. 나는 지금 전반적으로 행복하다. (굳이 전반적인 이유는, 코로나 & 재택 & 육아로 많이 행복하면 오히려 그쪽이 도라이이기 때문이다.) 결국 Retro를 적기 시작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금 이 순간, 일을 하며 행복한 기분을 오래오래 남겨두기 위해서.
회사에 필요한 일이면서, 내가 잘할 수 있는 일, 그리고 회사도 나도 '길님이 (내가) 하면 좋을 것 같다.'는 일을, 인생을 살면서 맡아볼 수 있는 기회가 몇 번이나 있을까? 올해로 11년이 된 회사 생활을 돌아보면, 그리 흔한 기회는 아니었던 것 같다. 앞서 '대기업 Product manager 생활'의 회고에서, 길게 적었던 것처럼, 주로 내가 공감가지 않는 일을, 남이 우선순위가 높다고 하여 해 오는 경우가 더 많았다.
심지어, 그 일이 IT에 관련된 일이고, (내 인생에서 의외로 중요한 요수 중 하나인) 남들이 알만한 회사의 Product다.
네, 이직해서 행복합니다. 10년 전에도, 15년 전에도 저는 컴퓨터로 사부작 거리는 일을 하며 먹고살고 싶었고, 10년 전의 저는 윈도 켤 때 나오는 회사 로고가 나와서 행복했던 저는 지금 게임 켜면 저희 회사 로고가 나오네요.
(사실, 아들이 아빠 무슨 회사 다니는지 알 수 있는 때까지만 다닐 수 있으면 좋겠는데, 지금 맡고 있는 일 다 하고 나면 또 회사에 월급 받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할 텐데, 그게 좀 걱정이 됩니다. 어떻게 되겠죠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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